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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여행기

전지적 셜덕 시점. 말 많고 사진 적음.


념품이들

도시보단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프랑스에 살다보니 유럽국가에 대한 환상이 닳아 빠졌다. 그런 내가 런던에 가게 된 계기는 물론 비비씨 셜록 때문이다. 한국 살 적에 썼던 셜존픽을 퇴고하면서 런던 근교의 이스트본이라는 지역을 새롭게 출현시켰는데, 아름다운 경치에 어울리지 않는 우울한 유명세 때문에 호기심이 들어서 직접 가보고자 했고 그래서 겸사겸사 런던 관광지도 일정에 끼워넣었다. 덕질 여행이니까 혼자. 걷는 거 좋아하는 뚜벅이다. 어딜 여행해도 뭘 잘 안먹고 그 돈으로 수집품을 사는 수집가이고 주로 책과 골동품을 산다. 옷은 서바이벌 모드: 방수와 보온. 히트택과 얇은 니트와 두꺼운 니트와 겨울등산점퍼에 캡모자, 스타킹, 바지, 부츠를 신었다. 왜 이렇게 껴입었냐면 내가 사는 프랑스 남부는 겨울밤에도 기온이 내려가봤자 영하 3도 정도로 날씨가 온화하고 쾌청한데, 왠일인지 내 핸드폰 배경화면에 실시간으로 며칠 내내 비가 주륵주륵 내리고만 있어서 날씨어플이 고장났나 의아하던차...나중에 확인해보니 런던 날씨를 확인하고는 런던을 내 위치로 설정해버려서 그렇게 내 핸드폰에도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 며칠 내내 비가 와서 런던에 해라곤 보이지 않는 것인가 싶었다; 뚜벅이라서 추위에 몸이 움츠러들면 아무 의욕이 나지 않으니까 겁을 먹고 단디 입었는데 도착해보니 날씨 괜춘했다. 춥고 비가 오긴 했는데 워낙 서바이벌 모드로 차려입었어서..스타킹은 안 입어도 되었다. 아무튼 이지젯 기내에 무료로 들고 갈 수 있는 사이즈의 더플백 하나에 세면도구와 속옷과 양말과 수건, 지갑, 이어폰, 충전기, 다이어리, 주머니칼, 에코백을 넣는 것으로 5박 6일 런던 여행준비를 마쳤다. 

이지젯을 처음 타봤는데 라이언에어보다 훨씬 쾌적한 비행이었다. 한시간 사십분을 날아서 개트윅에 도착했다. 입국심사가 갱장히 까다롭다고 하기에 살짝 쫄았는데 별일 없었구 오히려 너무 친절하고 프렌들리해서 몸둘바를 모를 정도였다. 토미 리 존스 닮은 입국심사 직원을 만났는데 내 여권커버를 벗겨도 되냐고 묻기에 내가 미안해하며 벗겨야 하는 줄 알았다면 미리 벗겼을 거야 하니까 괜찮으니까 걱정말라고 하면서 스무스하게 나의 여권 커버를 벗기고 몇가지 질문을 하고 바이바이 해줬다. 그를 지나서 미리 티켓을 끊은 내셔널 익스프레스를 타러 가는데 플랫폼이 헷갈려서 내셔널 익스프레스 데스크 직원에게 물어보니까 넘넘 친절하게 거기까지 안 가고 여기서 타도 돼~ 몇시에 몇번에서 타~ 헷갈리니? 하면서 차 오는 시간이랑 텀널 번호까지 내 티켓 종이에다가 써줬다. 플랫폼에서 차 기다리고 서있으니까 형광조끼 입은 귀요미가 나에게 와서 티켓을 보고 먼 버스 하나를 가리키면서 저거 타라고 해 줬다. 내가 의심스러워서 리얼리??하고 되물으니까 응^^;; 하면서 고개 끄덕끄덕 해주기에 그 버스로 가보니까 빅토리아 역으로 가는 내 버스가 맞았다. 호올...차창 너머로 지나는 집들을 보니까 집도 지붕이 반듯반듯하고 벽은 깨끗하고 잘 정돈된데다가 나무판자로 무슨무슨 가- 라고 알아보기 좋게 쓰여있는 게 프랑스의 집들과는 사뭇 달라서 흐음 이웃 나라인데 되게 다르네...하고 멍하니 구경하고 있다 보니까..아무래도 내가 싸가지 없는 프랑스인들에게 너무 시달린 바람에 유러피안의 기본 인성이 디폴트로 상냥할 수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맞아. 그게 맞는 것 같아.

게다가 도착하고 보니 날씨도 너무 좋잖아...? 홀린듯이 인파들 사이를 걷다 보니 유적지에 도착했다. 파리에서도 느꼈던 강대국의 좋은 점이란 그런 것이다. 걍 걷다 보면 머지 않아 역사 깊고 중후한 핫플레이스가 나옴. 사진을 찍기는 했는데 핸드폰이 4년인가 묵은 녀석인데다 보정을 안해서 거의 기록용임... 

유적지엔 별 관심이 없어서 외관만 보고 패스하였다. 버킹엄 궁전이랑 무언가들이 나왔는데 그것들 근처에 있는 환전소를 찾아다가 길을 잃었다. 나는 방향치다. 그래서 환전을 못하고 소호에 있는 소호스텔로 가서 체크인을 한 후 곧장 영국도서관으로 걸어갔다. 해리포터 전시회 티켓을 미리 끊어 놓았었다. 롤링이 해포를 쓰면서 참고했던 도서들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영국도서관이 소장 중인 다른 나라의 유물 들이었다. 프랑스의 약학 서적이나 그리스 신화와 괴물들, 일본, 중국의 괴담, 천문학 자료 같은 것들. 딱히 기억에 남는 건 없었고 롤링이 이런 걸 참고했단다~ 초고는 이랬단다~ 이게 롤링이 직접 그린 호그와트 내부 혹은 누구누구란다~ 하는 식이어서 개인적으로는 전시를 보지 못했다고 후회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나라에 있는 내 나라의 보물을 보려고 내 돈 내고 간혹 무례한 현지 관광객들 틈에서 부대껴야 하는 게 싫으면 패스할 만 했다. 환전을 하지 못 했으므로 1층에서 티켓이 없어도 입장할 수 있는 샵은 구경만 하고 나옴.

한 호스텔에 5박 6일을 보내는게 재미 없을 것 같아서 3군데를 이동하면서 묵었는데, 첫날부터 2박의 호스텔이었던 소호에 있는 소호스텔이 제일 좋았다. 8인 믹스룸에 묵었다. 4인 룸이어도 4인이 꽉 차 있으면 4인이 있는 8인 룸보다 갑갑한지라 비수기인 점을 노려서 8인 룸을 예약한 것인데 역시나 반 밖에 안 차서 넉넉하고 조용했다. 침대 아래에 캐리어도 들어갈만한 보관함이 있었는데 철제라서 무겁고 만질 때마다 소음을 내는 것, 내 침대 매트리스가 얇고 가운데가 푹 꺼져있어서 불편했던 것 (기절잠 자면 문제 안됨), 2층 침대 프레임이 허술해서 조금만 움직여도 위아래 층으로 움직임이 전달된다는 것 (기절잠 자면 문제 안됨2), 거울과 드라이기가 있는 뷰티 팔러가 지하 1층에 있어서 젖은 머리로 내려가야 한다는 귀찮음 정도가 손에 꼽을 수 있는 단점이었다. 화장실 깨끗했고, 샤워룸도 양호했고, 다만 샤워룸의 문이 어긋나서 잠글 수가 없었는데 내가 있을 때 직원이 와서 고치려는 듯이 보고 갔어서 관리를 하는구나 싶었다. 소호스텔에서 파는 아침식사가 있는데 그건 안 사먹어봤고 체크아웃날 아침 내가 가진 스콘을 들고 내려가서 '커피만 사먹을게 내 스콘 여기서 먹게 해줄래?' 하니까 커피도 그냥 마시라고 해줬다. 그리고 첫날 귀요미 직원이 나를 데리고 구석구석 시설을 안내해 주면서 내 방까지 데려가 주었다. 친절쓰. 

암튼 담날 일어나서는 옥스포드가에 있는 토마스 환전소를 찾아갔다. 300유로를 257파운드로 바꿔주었는데 평판과는 달리 친절과 거리가 멀어서 옥스포드 가의 토마스 환전소는 추천하고 싶지 않음. 참. 9시 오픈 시간을 밖에서 기다리기 너무 추워서 근처에 코스타 커피가 있길래 들어가서 플랫화이트와 에그 머핀? 을 먹어 보았다. 걍 계란과 치즈와 빵이었어서 맛이 없을 수가 없겠지만 (이라고 말하면 정색하며 '아냐 그럴 수 있어' 라고 하는 경험자도 있음) 놀랍게도 괜찮았고 커피도 밍밍하지 않고 거품 부드럽고 생각보다 괜찮았다. 정말. 내 뒤에서 주문하려고 줄 선 런더너들이 정상적인 미각을 가지고 있네 싶었다. (프랑스 로컬 까페에서 마실 수 있는 라떼류의 충격적인 맛에 익숙해져서 감을 잃었을 가능성 있음) (=우유가 들어갔구나 싶은 물맛+커피) 

그리고

데이시트를 사러 갔다. 킹키 부츠는 내가 오른쪽에 두는 젠킬의 네잇 중위 역을 맡았던 스탁 샌즈가 뉴욕에서 공연했던 작품인데.. 최애라도 필모는 잘 안 팜 + 미국 관광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볼 기회가 없었고..런던에서도 하길래 영국버전이라도 봐야겠다 싶어서 여정에 넣었다. 밤에는 야경을 보거나 펍에서 술 마시는 것 외에는 딱히 할 게 없기도 했다. 데이시트는 작품마다 다르지만 당일 공연 표를 당일 아침에 싸게 (20파운드)파는 것이고 킹키부츠의 경우 아델피 극장에서 열시 반에 판매 시작이어서 소호 거리를 걸어 내려가며 구경했다. 셜록 시즌 1에 존과 셜록이 택시기사를 기다리며 밥 먹은 레스토랑을 지나쳤는데 언뜻 보니 내부가 달라져 있었다. 왜일까. 아무튼 아델피 극장에 열시에 도착해보니 내 앞에 4명이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위 사진의 사인을 보고 30분이나 시간이 있구나 싶어서 근처 세인즈버리에서 

치약을 사고 스콘과 클로티드 크림을 샀다. 나는 솔로로 여행할 땐 당최 뭘 안 먹는다. 한국에선 마음이 허하면 음식으로 달래고 아웃백도 혼자 가는 뻔뻔한 사람인데 여행을 하면서는 눈이 바쁘고 발이 바빠서 허기를 잘 못 느낀다. 런던 여행하면서 먹은 게 손에 꼽는데 그 중 하나가 요거다. 가지고 다니면서 하루에 하나씩 아침 혹은 점심으로 먹었다. 마지막 하나는 마지막날 프랑스로 돌아가는 루튼 공항에서 먹음. 주머니 칼이 있으면 사과도 깎아 먹을 수 있고 크림도 발라 먹을 수 있고 호신도 되고 쓸모가 많다. 칼날이 6센치 이하면 기내에 들고 탈 수 있으니 하나쯤 있으면 좋다. 사진 속 칼은 프랑스에서 산 opinel 2호로 매우 쁘띠하고 (접으면 새끼손가락만한) 가격도 만오천원 정도이다. 아마 3호도 기내에 반출 가능할 것 같음. 근데 결정적으로 클로티트 크림이 그닥 허얼 존맛~! 은 아니었음ㅋㅋ 프랑스 디저트에 입맛이 길들여져서 그런가 내가 산 제품이 쏘쏘한 것인가 알 수 없다. (왼쪽 상단에 포장지)

20분에 극장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 멤버 그대로였다. 놀랍게도 데이시트를 사러 오는 사람들의 절반이 한국인이었고 더 놀랍게도 바로 앞자리를 주었다! 좌석 기대를 안 했는데 직원이 모니터로 앞자리 정 중앙을 보여주면서 여기 괜찮으냐고 물으셨다;; 아이고 네네...

표를 산 후에는 트랜스포트 뮤지엄 샵에 갔다. 웹사이트에서 구경했을 때 사고 싶은 물건이 있었는데 그것 외에도 반값 세일하고 있는 물건들을 보니 눈이 돌아가서 35파운드를 써버렸고 그 시점에서 이미 내 더플백의 반이 차게 된 셈이었다..그리고 점 찍어둔 서점 중 한 군데에 들어갔는데 곧바로 23파운드를 써버림.. 그리고 셜록 박물관을 갔다. 사실 셜록 박물관이 있는줄 모르고 베이커 가를 가보자 해서 간 것인데 거기에 셜록 박물관과 샵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목적이 셜록 덕질인 여행인데 정작 셜록 덕질은 많이 안 한 것 같다...? 셜록 박물관 문 앞에 옛 경찰복장을 한 남자가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줄이 좀 있었고 박물관에 그닥 볼게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던지라 샵만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 홀린듯이 40파운드를 써버림..ㅠㅠㅁㅊ..예산이 많지도 않은데 가게를 들어갔다 하면 지갑을 열게 되어 돈도 돈이지만 더플백 하나에 다 들고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서점에서 책을 세 권 집어든 순간부터 자연스레 '수건을 버리자' 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인데다가 마구 사제끼다간 내 가방에 다 넣지 못해서 어느 가게에 들어가 가방을 하나 산 후에 추가 수화물 가격을 내고 귀환하거나 공항에서 물건을 버려야 하는 사태가 일어날 것이었기에 바짝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책을 잘 읽지는 않는데 오래된 책을 수집하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 영국 여행은 정말 텅장의 지름길이었다...중고 책들의 가격대가 그다지 저렴하지는 않아서 많이 살 수는 없었던 게 다행이었다...

맙소사..그렇게 짐와 통장의 상태를 고려해 나 자신과 타협하는 동시에 길을 잃고 헤메고 목적지를 지나치고 피곤해서 포기하고 걷고 걷다 보니 발이 아팠는데 발이 아픈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침 8시 반부터 킨키부츠가 시작하는 7시 반까지 쉬지 않고 걸었으니..그래서 발이 아픈게 이상하지 않았고 무시했다. 킨키부츠는

증말 내 자리에 앉으면 삼미터 앞에 저 판이 내려와 있었음. 그리고 증말 옆옆자리 바로 코앞에선 디지털피아노를 연주하는 지휘자의 반들반들한 정수리가 있었음. 그리고 내 자리에서도 무대 밑을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지휘자의 지휘에 맞춰서 첼로를 연주하는 사람과 드럼을 연주하는 사람이 보였다. 그리고 내 머리 위에서 드랙퀸들이 힐 신은 다리를 쩍쩍 벌리면서 치마를 팔랑거리고 백덤블링을 하고 가위찢기를 하고 난리가 났다. 그리고 앞자리가 극장 내 바와도 가까워서 바로 맥주 (5파운드) 사서 착석함. 시작하기도 전에 다 마셨다. 꿀맛이었따. 킹키 부츠도 재밌었따. 오리지널에서 스탁이 했던 찰리 역을 맡은 배우를 보며 스탁이 저렇게 청량하게 노래했을까 상상했다...스탁이 아니니까 내 기대치도 낮았는데 놀랄만큼 노래를 잘 했다. 음색도 비슷해서 소화를 잘 하는 것 같았는데..오리지널을 본 적이 없으니까 모름..흐흑.....

신나게 보고 소호로 걸어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찹스틱스라는 체인음식점이 있기에 볶음밥에 굴소스치킨 토핑을 끼얹어서 먹어봤는데 맛있었다. 이틀 동안 먹은 게 스콘 하나였으니까 맛이 없을 리 없었다. 양이 너무 많아서 반만 먹고 나머지 반을 다음날 점심으로 먹었다.

젠킬 픽 쓸 때나 쓸 법한 문장이지만 호스텔에 도착해서 내 부츠를 벗었을 때 시체 썩는 냄새가 나서 옆에 있는 룸메이트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런던 여행 둘째날 나는 왼쪽 새끼 발톱을 잃었다. 정말 달랑달랑하게 들려있기에 걸을때마다 아파서 빼버렸더니 빠졌음. ?!?!? 피는 나지 않았는데 발톱을 잃은, 내 나이 먹도록 단 한 순간도 맨살을 공기에 노출하지 않은 내 새끼발꼬락이 극도의 예민보스가 되어 내 눈치를 보게 했다. 살점은 정말 빨개서 왜 피가 나지 않는 것인지 의아했는데 정육점의 고기를 떠올리니 뭔가 납득이 갔다. 맙소사..비위 상하는 여행기라 죄송한데다 계속 묘사할 거리가 떠올라서 곤란하지만 정말 그 부분은 예민보스였고 내 손길은 커녕 시트도 스치면 짜증을 냈기 때문에 이불 밖으로 내놓고 잠을 청했다. 누군가는 혀를 차겠지만 나는 전지적 뚜벅이 시점인 내 여행 스타일과 다음날 계속되는 서점 투어와 해리포터 스튜디오에서 4시간을 걸을 스케줄이나 5박 6일 있으면서 호스텔을 3번 갈아 타는 이상한 취향을 변경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약국에서 크림과 밴드를 사는데 너무 큰 돈이 들지 않아서 한 권의 책이나 기념품을 포기하는 스튜핏이나 걸음속도가 느려져서 찍어둔 서점이나 레코드샵, 벼룩시장을 스킵하게 되는 비극만을 걱정했다. 

거의 기절한 듯이 잠을 자고 일어나 소호스텔을 체크아웃하니 비가 오고 있었다. 내 가방엔 이미 트랜스포트 뮤지엄 샵에서 산 기념품들과 하드커버 중고책 세권으로 거의 가득차 있었고, 발꼬락이 극적으로 낫거나 / 아예 악화되어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은 겁나 애매한 상태였기 때문에 목요일 아침에만 열리는 골동품 벼룩시장 한 군데를 포기하고 (젠장) 유스턴역 근처에 잡아둔 펍러브 호스텔에 가방을 맡기고 캠든을 구경하기로 했다. 캠든을 가는 이유는 역시나 셜록 팬픽을 퇴고하면서 새롭게 등장시킨 장소이기도 한데 그곳에 괜찮은 서점과 직소퍼즐을 파는 가게가 있다고 해서 가는 것이었다...당시까지 지하철로 내려가지 않았으므로 오이스터 카드도 없었고 걷다 보니 걸을만 해서(?) 유스턴 역 근처의 펍러브 호스텔로 향하며 약국을 찾았으나 눈에 뜨이지 않았고 결국 호스텔에 도착해서 짐을 맡겼다. 아침은 안 먹어도 커피는 마시고 싶어서 펍에서 플랫 화이트를 또 한 잔 시켜 먹었는데 맛이 괜찮았다. 안경 쓴 검은 머리 백인 여성 직원은 약간 싸가지가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대채로 싸가지가 없는 런더너들은 말을 몇마디 나누다 보면 뒤늦게라도 싸가지를 갖추곤 했다. 영어를 못 해서 대화가 원활하지 않거나 땡큐, 쏘리, 익스큐즈미를 습관적으로 붙이지 않으면 계속 싸가지가 없었을 것 같다. 

가방을 맡기고 유스턴 역에서 드디어 말로만 듣던 오이스터 카드를 산 후에 캠든으로 걸어가다가 약국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아침에 양말을 신기 전에 새끼 발꼬락이 약간 부어 있었기 때문에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른 후 뭐라도 붙여야 고통이 덜할 것이었는데 그런 작업을 할 곳이 마뜩찮았으므로 직원에게 한쪽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면서 여기서 그 짓을 해도 되냐고 물었다. 내 새끼 발꼬락 상태를 묘사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커버할 스케줄이 있으니 상처가 곪지만 않게 약품을 추천해달라고...발꼬락이 곪으면 진짜 한 걸음도 못 걸을 정도로 아프다는 사실을 내향성 발톱으로 고통받았던 어린 시절의 과거 덕에 알고 있었다. 직원이 내 말을 들으면서 리액션으로 끔찍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신발을 벗고 보여달라고 했다. 그래서 보여줬더니 '오 노...'라며 혀를 찼다. 그리고는 적절하게 약품을 골라주면서 지금은 소독 후 밴드만 붙이고 밤에 잘때 부위를 건조하게 말리고 크림을 바르고 자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렇게 응급처치를 한 후에 약국을 나서 캠든에 있는 서점으로 천천히 걸어가다보니 낯익은 교회가 보였다.

구리구리한 날씨 때문에 감옥 같지만 교회이고 역시 셜존 소설에 멋대로 등장시켰던 곳이다. 웹사이트로만 찾아봤었고 잊어버려서 가볼 생각은 못 했는데 보자마자 엇 하고 알아봄. 

사진 못찍음 주의...발도 아프니까 들어가서 앉았다. 나는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종교문화에 비관적인 편이다. 2017년 9월 27일에 올린 <개를 위한 존 왓슨>편에서 존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찾아가는 교회로 썼는데, 직접 가서 맨 뒷줄에 앉아서 십자가와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을 보니까 갑자기 눈물이 났다. (뜬금없이 겁나 잘 우는 사람)

사이먼이 다니던 교회는 아담하지만 역사 깊은 교회로 같은 구에 있었다. 동행이 있다면 천천히 걸어 갈 만한 거리였으나 지하철을 탔다. 도착하니 교회 내부엔 제일 뒷자리에 앉아서 쉬고 있는 관광객 둘이 전부였다. 사이먼의 집에서 십자가를 보고 마음이 철렁했던 것도 죄책감이었을까, 제단 너머의 십자가를 보고는 마음이 온화해지고, 묵직한 고요함 속에서 냉기가 서린 뺨도 간지러워졌다. 아무도 없는 제단 쪽으로 홀린 듯이 걸어가다가, 이 안에 가만히 앉으면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이 마음에 들어서 세 번째 줄에 앉았다. 꼬박꼬박 교회를 찾는 성격이 아님에도 고마워할 줄은 알았다. 무엇을 할 필요 없이, 나에 대해 변명할 필요도 없이, 뻔뻔하게 앉아서 무한한 관용을 누리기만 하면 되니까. 


라고 썼었구나. 내 소설의 존 왓슨은 지하철을 탔군. 버스가 나았을 텐데. 라고 이제 생각할 수 있고 그렇게 고칠 수 있다. 제일 뒷자리에 앉아서 쉬는 건 내가 어느 교회에 가서도 자주 하는 짓이다. 기도하던 사람이 두 명 있었는데 둘이 나갈 때까지 기다리다가 무언가를 했다. 이제 그 무언가도 소설을 고치면서 존이 한 것처럼 써 넣을 수 있다. 

그리고 캠든...캠든은 마켓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내 취향의 마켓이 아니라서 건너 뛰려다가 직소퍼즐을 파는 가게를 찾느라고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무수한 가게들과 물건들 틈에서 내가 가려던 가게는 찾지 못했지만 서점은 찾을 수 있었고 레코드샵이 있길래 봤더니 matchbox20 중고씨디를 2파운드에 팔길래 얼른 집어왔따..! 피키 블라인더스에서 토미 쉘비가 런던으로 갈 때 이용했을 법한 작은 수로와 보트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문명인 답게 버스를 타고 호스텔로 돌아와 체크인을 한 후 

성지순례를 했다. 날씨가 궂어서 그런지 관광객을 포함해 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관광지스러웠고 여러 개의 사인으로 '들어와서 뭐라도 사먹으렴' 하는 공격적인 마케팅이 느껴져서 오히려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여기가 거기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을 뿐 딱히 특별한 감상은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외관만 보면 충분했으므로 서둘러 다음 목적지인

해리포터 스튜디오로 향했다. 셔틀 기다리는데 좀 추웠음. 5박 6일 여행 중 사진을 꼴랑 270장 찍었는데 해포 스튜디오가 30프로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패스포트..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도장을 찍을 때 종이 한 장만 넣지 않고 여러 장을 넣어서 뒷면에도 도장이 새겨졌다. 매사 기대치가 낮은 사람이라 그런지 해포 스튜디오도 재밌었고 돈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갔을 때 한 열흘 정도로 필름메이킹 단계에서 제작된 종이 건물 모형들이 전시되는 기간이어서 볼 거리가 아주 조금 더 있었다. 종이로 만든 3D퍼즐에 색깔이 입혀지지 않은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거 보고는 위즐리네 집 3D퍼즐 구매욕구가 돋았었으나 내가 사려던 것만 샀다. 래번클로 자수 패치..헤헤

펍러브 호스텔은 exmouth 점이었는데 일단 펍이 1층에 있다보니까 쾌적함이나 위생은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오후에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구경하고 나면 밤인데다 많이 걸어 피곤할테니 유스턴 역으로 돌아왔을 때 이동거리를 최소화 하고자 했다. 이곳도 역시 9인 믹스룸을 택했는데 게스트는 나 포함 3명이었다. 3층 침대였고 제일 위층에서 잤는데 매트리스가 괜찮아서 조용하기만 하면 꿀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나는 금요일밤에 묵었고 밤 열두시까지 1층에서 음악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파티를 하는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렸고 내 아래층에 들어온 아저씨가 코를 너무 골아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음. 알고보니 연령제한이 없는 호스텔이었고 이미 며칠째 묵고 있던 남자가 나중에 말하길 나와 그 아저씨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자기 혼자 방 쓰면서 파티도 없었고 레알 쾌적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 기준으로 화장실이 정말 더러웠다. 외관은 깨끗한데 조명빨이지 청소를 잘 안 하는 것 같았다. 직원들이 밀고 다니는 화장실 청소도구가 담긴 카트도 본 적이 없음. 하룻밤만 묵어서, 샤워할 계획이 없는 호스텔이어서 다행이었다.

코를 정말 시끄럽게 골면서 뒤척이는 아래층 아저씨 때문에 잠을 설치고 퀭한 몰골로 체크아웃한 나는 다음 호스텔인 Astor로 향했다. 빅토리아의 벨그라브 가에 있는 호스텔로 셜록 시즌2의 스멜을 느낄 수 있기에 2박을 한 곳이었다. 짐을 내려놓고 미리 표를 사둔 V&A 박물관의 위니더푸 전시회를 보러 갔다. 계속해서 비가 왔으나 방수옷과 캡모자 때문에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역시 걸어갔고 가다가 작은 식료품 마켓이 열려있기에 아 오늘이 토요일이구나 싶었다. 뭔가 하나는 먹어 줘야 할 것 같아서 구경하니 키쉬를 파는 게 보였다. 프랑스사람들이 파는 프랑스 음식들 중에서도 키쉬(식사용 타르트)가 있었는데 비싸서 영국인 아저씨가 파는 키쉬를 하나 달라고 했다. 시금치에 페타치즈에 돼지고기면 맛이 없을리가 없어 라고 생각하며. 마감세일이라며 3개에 5파운드에 주겠으니 가져가라고 했는데 너무 많다고 사양했다. 실제로 이때 산 키쉬를 그날 먹지 않고 들고 다니다가 다음날 먹었다..날씨가 추워서 가방에 키쉬며 클로티드 크림을 들고 다녀도 상하지 않았다. 

위니더푸 전시. 원화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귀여워...ㅠㅠ 아동들 눈높이에 맞춰서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설치물들도 많았는데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닥 붐비는 느낌은 아니었다. 킨키부츠 데이시트를 제외하고는 모든 티켓을 미리 끊어놨었고 입장시간을 선택했던지라 관객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 폰 : 죽여..줘.....

밤에는 런던아이를 보러 갔다. 원래 콘서트를 가려고 며칠 전부터 표를 알아봤었는데 내가 가고자 하는 건 다 매진이었구..ㅜㅜ예매에 성공했대도 그 발로는 콘서트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을 것 같다.....면서 핌리코부터 템즈강을 따라서 런던아이까지 걸어갔다는 사실....그리고도 호스텔로 들어가기 싫어서 그래 바츠를 가보자! 해서 생폴성당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내 폰: 죽여....줘......

바츠가 생각보다 커서 한참 걸어 도착했다. 토요일 밤에 런던사람들은 어디서 뭘 하는 건지 이 근방엔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셜록이 떨어졌던 자리에 가보니 셜덕들이 남긴 낙서들이 보여서 웃었다.

빅토리아에 있는 Astor 호스텔은 시설이 좋으리라고 기대했는데 아니었다. 근데 이건 층별로 다른 것 같다. 스탭이 내 방을 지하 1층으로 배정해줬는데 바로 옆에 스탭들이 묵는 방이 있었고 조식을 주는 까페테리아가 있는 층이어서 그 곳의 화장실과 샤워실은 말그대로 공중시설의 느낌이었다. 이 호스텔은 연령대가 대체로 낮았고 밤에는 스탭 중 누군가가 피우는 것 같은 마리화나 냄새가 스멀스멀 기어들어오기도 했다. 목이 말라서 까페테리아에서 물을 찾으니 탭워터를 마시라고 해서 머그컵을 하나 집어들어서 받아 마셨다. 그런데 알고보니 자기가 마신 컵은 자기가 씻어서 엎어두는 시스템이었고 물 때가 낀 싱크대에 물과 세제에 푹 젖은 더러운 스펀지를 보니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모든 샤워실에 거울이 없었고 내 층의 샤워실보다는 그나마 윗층의 샤워실이 나았다. 따뜻한 물이 나온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조식은 1파운드를 바구니에 알아서 넣고 먹는 식인데 시리얼은 눅눅해보였고 우유는 왠지 손대기 싫었으며 내가 집어든 접시의 위생상태를 가늠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기에 토스터에 식빵 두 쪽을 넣고 블랙커런트 잼만 발라 먹었다. 소호스텔이 그리워졌다.

거의 마지막 일정인 일요일엔 런던 근교의 이스트본행 기차표를 끊어둔 날이었다. 여행 후기를 쓰리라고 마음을 먹게 된 곳이기도 하다. 이스트본으로 가려면 빅토리아역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편하다.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예보를 봤는데 런던에서 출발할 때와는 달리 도착하니 날씨가 너무나 좋았다.

찍은 사진의 백 장은 이스트본에서 찍은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나 점찍어둔 서점이 있었는데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다. 테스코와 레스토랑을 제외한 가게들이 다 문을 닫았고 거리에 사람도 별로 없었다. 걸어서 해변으로 이동했더니

사람들이 죄다 해변가를 걷고 있는 것이었다. 

컴버랜드 호텔이라..

보통은 다양한 연령의 주민들이 개를 데리고 산책하고 있었다. 개들이 얼마나 자주 눈에 띄었느냐면 애들보다 개들이 더 많았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런지 내가 생각했던 우중충한 이미지와는 너무나 달랐고, 바람이 좀 강하게 불긴 했지만 평화 그 자체였다. 관광객처럼 보이는 사람도 없었지만 동양인은 정말 나 혼자였다. 해변가를 따라서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고, 해변을 볼 수 있게 밤색 벤치가 죽 늘어서 있는데 자세히 보면 각기 다른 이름이 쓰여있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엄마, 누구누구> 혹은 <누구누구를 기억하며, 1951-2005> 이런 식이다. 돈을 내고 원하는 문구를 새길 수 있게 한 것 같다. 내가 사는 프랑스 동네에는 시장이 바뀌면서 가로수길을 새로 놓는데 손바닥만한 금속 이름판을 주민들에게 판 적이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이름들을 구경하며 남쪽으로 걷다 보면 비치헤드라는 절벽으로 길이 이어진다. 내 목적지는 바로 비치헤드의 절벽이었다. 역시나 소설 속에서 멋대로 쓴 배경. 가는 길에 라이프 보트 박물관샵이 있기에 기념품도 구경하고 뭐 좀 물어볼 겸 들어가봤다. 해변에 도착했을 때는 11시였고 런던으로 돌아가는 기차는 오후 4시였는데 걸어서 비치헤드를 찍고 걸어서 돌아와도 시간이 넉넉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내 수중의 현금은 딸랑 3파운드였는데, 1파운드 짜리 자수패치와 2파운드 짜리 시솔트캬라멜퍼지 바를 홀린듯 집어들어 3파운드를 지출하고 만다. 박물관샵에는 귀여운 할머니 두 분이 카운터에서 대화를 나누고 계셨는데 내가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꺼내니 내 곰돌이 지갑을 보고 (스콘짤 참조) '어머 저 지갑 좀 봐 얼마나 사랑스러운 테디베어인가!' 하고 좋아하셨다. 거기다 대고 나는 눈치없게도 '고마워. 프랑스에서 산 거야.' 라고 찬물을 끼얹어버렸고 두 할머니들은 '오.' 하고 입을 다무셨다. 아무튼 계산을 하고 비치헤드로 가는데 왕복 네시간이면 충분할까 물으니 한 분이 돌아올 때 '버스를 타고 오라'고 하셨다. 현금을 다 써버린 참이어서 걸어서는 안될까? 했더니 약간 빠듯하다는 듯 갸웃하셨다. 그러나 다른 한 분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아냐....그녀는 할 수 있을 거야...' 라고 중얼거리셨다. 부츠 안에 새끼발톱이 빠져 짓물이 나고 있고 고통을 최소화 하며 걷다 보니 골반마저 뒤틀려 간헐적으로 찌릿거리는데도 비치헤드를 걸어서 가겠다고 하는 내 독기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그리고는 바람이 강하니 해변 따라서 가지 말고 도로 따라서 가다가 언덕길로 올라가라고 했다. 파도에 휩쓸릴 수 있다고. 내 목적지는 절벽 위였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바이바이 했다. 여기서 산 시솔트캬라멜바가 아예 부드럽진 않고 약간 서걱거리는 질감이었는데 당 떨어질 때 아주 좋았다. 단짠bb 

내 목적지가 저 제일 먼 절벽 위
요렇게 된 산책로이다. 가다가 뒤돌아서 찍은 것. 개가 많다.
산책로가 끝나면 이런 도로가 나온다. 도로 끝에 보이는 언덕 위로 올라가는 것.
언덕 중간에서 뒤돌아서 한 컷 찍음. 길은 잔디와 진흙탕이다.
아직도 갈길이 한참
다 올라옴?

언덕 올라오면서 느낀 건 바람. 프랑스 남부도 바람으로 유명해서 웬만한 바람으로는 놀라지 않는데 이 언덕엔 나무가 없고 민둥민둥해서 바람이 아우토반을 달리는 것처럼 불고 있다. 캡모자가 날아갈 것이라 점퍼에 달린 모자를 쓰고 모든 지퍼란 지퍼는 다 잠갔다. 계속 가다보니 저 멀리 덩그라니

벤치가 하나 있길래 가까이 가봤다. 사실 겁나 녹초상태였기 때문에 앉을 곳이 필요했다. 앉아서 에코백에 넣고 온 키쉬라도 먹을까 했다.


뜻밖의 낭만. 근데 여기 앉아 있자니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 사진만 찍고 다시 길을 나섰다. 

약간 대관령의 양떼목장이 생각나기도 했다. 다만 양은 없고 양이 남긴 똥과 관목과 잔디밭과 외길과 바람 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비치헤드에 다다랐다.

저 멀리 보이는게 프랑스의 깔레인가? 궁금했으나 남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무언가를 할 정신이 없다. 사진으론 찍히지 않았으나 엄청난 바람이 불고 있고 내 에코백이 45도 각도로 기울어져 있으며 바람이 내 몸을 휘청휘청 때려서 중심 잡기도 힘들다. 그 바람 속에서 손바닥만한 스마트폰을 잡고 사진을 찍고 있으면 핸드폰을 놓칠까봐 손에서 땀이 밴다. 그리고 이런 게 있다.

덩케르크가 생각나는 순간. 영국인이라면 국뽕이 찰 만한 장소이다.

바람은 미친듯이 불고 햇빛에 눈이 부셔서 핸드폰 화면도 보이지 않으니 내가 사진을 잘 찍고 있는건지 확신 없이 찍은 결과물이다. 사진 구석에 보이는 벤치엔 할아버지 한 분이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늙고 작은 소형견을 데리고 시원하다는 듯 앉아있었다. 과연 현지인의 포스란...

그리고 바람이 미친듯이 부는 가운데 쉬어 가고 싶어서 양 똥을 피해서 잔디 위에 철푸덕 앉았다. 뭐라도 먹어야 돌아갈 기운이 날 것 같아서 키쉬를 주섬주섬 꺼내는데 똑똑한 까마귀 한 마리가 저기 내려앉더니 나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바람이 너무 불어서 휘청거리면서 게걸음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게 너무 귀여워서 사진을 찍고 동영상도 찍었다. 키쉬의 타르트 부분을 조금 떼어서 던져주니 얼른 받아 먹었다.


그러니 갈매기도 냄새를 맡고 다가왔다. 처음엔 저 왼쪽의 한 마리였는데 저 녀석한테도 타르트를 조금 떼어 주니까 받아먹고는 꾸에엑 하고 친구를 부른 것이다. 

그러더니 내 주변으로 갈매기 열댓마리가 모여들었다. 사진으로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진짜 컸고 날개를 피면 더 컸고 열댓마리가 내 쪽으로 슬금슬금 모여드는게 흡사 포위망을 좁히는 것 같았다. 작고 귀여운 까마귀는 근처에 얼씬도 못하고 먼 발치에서 나를 구경하고 있었고 나는 갈매기들의 눈치를 보며 내 소중한 키쉬를 허겁지겁 먹어 치워야 했다. 시금치와 페타치즈와 돼지고기는 맛이 없을 리 없었으며 애초에 뱃속에 든 게 없으니 뭘 먹어도 맛있었을 것이었다. 타르트 부분은 갈매기들에게 양보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갈매기들을 피해 발을 옮기는데 마법진이 눈에 띄었다. 호에

내 뒤를 쫓는 녀석
대따큼

진짜 큼

집요한 그들은 내 머리 위를 날고 내 길을 앞서가기도 했는데 비록 그들이 원하는 게 빵쪼가리일 뿐이더라도내 입장에선 강풍을 뚫고 갈매기 군대를 이끄는 기분이라서 멋진 경험이었다. (새 좋아함)

백미터 떨어진 곳에 하얀 절벽이 보였는데 내 소설에서 쓴 장소이기도 해서 비명을 지르는 발꼬락으로 어그적어그적 걸어갔다. 당장 백미터 더 걷는 게 나중에 한국에서 팔천킬로미터 날아오는 것보다 가까우니까..

세븐시스터즈의 하얀 절벽이 여기까지 이어져 있다. 이곳에선 등대가 보인다. 

레알 아찔함. 박물관샵의 할머니가 절벽 끝에 서지 말라고 했다. 땅이 크럼블해서 잘 무너진다고. 사람들이 자살을 하기도 하고 사진을 찍다가 사고도 많이 당하는 위험한 곳이다. 자원봉사자들이 단체로 저 아래 해안선을 돌면서 시신을 찾아내기도 한다. 내가 쓴 글 속에서는 존이 혼자 사건 조사하다가 바람쐬러 올라왔다.

중구난방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비틀거리며 절벽 가까이 다가갔다가 또 숨이 막혔다. 갑자기 나타난 드넓은 바다와 내 얼굴을 밀어내듯 덮는 바람이 아찔하게 내 호흡을 방해했다. 안개 낀 수평선의 경계가 불분명해 마치 하늘과 섞여 들듯 했고 그것을 보는 내 평행감각도 덩달아 위태로워졌다. 두려움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절벽 끝에 배를 깔고 누워 아래를 내려다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발밑을 내려다 보지 않으면 아쉬울 것 같아서 나도 끝으로 더 다가갔다. 까마득한 높이와 엄청난 길이의 백악절벽 위에서 두 다리가 굳은 건지 떨리는 건지 몰랐다. 옆을 보니 절벽 아래에서 파도가 쉴 새 없이 몸을 부딪치며 부서지고 있었고 그 혼돈 속에 크리스마스 사탕막대처럼 귀여운 등대 하나가 서 있었다. -개를 위한 존 왓슨 中

진짜 귀여웠음ㅋㅋ 나도 바람 쐬러 올라왔다가 바람이 뭔지 알고 간다. 기차를 놓칠까봐 서둘러 내려왔다. 그러다가 시간이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을 것 같아서 박물관샵을 다시 들리기로 한다. 런던의 트랜스포트뮤지엄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서 카드를 긁어서라도 사고 싶은 것이 있었음. 갈매기가 그려진 티매트(6) 와 선물용 민트드롭(2.5)을 샀다. 아까 봤던 할모니에게도 살아서 돌아왔다고 인사했다. 

기차타고 다시 런던으로 도착하니 해가 졌고 다음날 새벽에 공항으로 출발해야해서 그날 밤이 런던에서 보낼 마지막 시간이었다. 영국에서 영국음식은 먹어봤자 맛이 없다고들 하니 오히려 여러 다른 나라의 음식을 경험해 볼 좋은 기회 같아서 인도, 타이, 그리고 먹어본지 오래된 한식을 최후의 만찬으로 즐기려고 했는데 결국은 파이브 가이즈를 택했다. 명성은 자자한데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서 궁금했음. 리틀베이컨치즈버거에 마요랑 비비큐소스만 넣고 리틀프라이를 시켜 먹었는데 꿀맛이었따. 그것도 남아서 다음날 프랑스에 도착해서야 끝냈음...

다음날 새벽 여섯시 반에 빅토리아 역에서 그린라인 버스를 타고 루튼 공항으로 가야 했다. 새벽 네시에 눈이 떠져서 다섯시에 인적이 뜸한 빅토리아 역에 도착해서 정류장을 찾았다. 6번 정류장이었는데, 1, 2, 3, 4, 5번 정류장을 쭉 따라가니 6이 있어야 할 표지판에 정작 6이 없었다. 어떤 부연 설명도. 원래 그곳이 6번이었는데 다른 곳으로 옮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프랑스의 어처구니 없는 시스템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여기가 맞을 거야 하고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프랑스라면 그 자리에 내 버스가 와서 섰을 것이며 체계가 분명히 엉망이고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나는 내 버스를 놓치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괜찮다는 태도의 현지인들만 자연스레 버스에 탑승했을 것이었다. 한시간 반을 기다리니 내 버스가 아닌 내셔널 익스프레스 버스가 와서 섰는데 운전기사분이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눈치채고 대단히 친절하게도 여기가 아니니 어디로 가라고 안내해 주셨다. 관광업에 종사하는 영국인들의 친절은 감동적인 수준이었다. 일을 하고 있는 런더너에게서 친절을 느낀 게 나에겐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지는데 프랑스 사람들은 일을 하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개처럼 으르렁대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국 사람들보다 일도 덜 하면서 말이다. 마치 '다른 인간들이 다 놀고 있을 때 나는 일해야 하는 환경에 처해 있는 것도 충분히 좆같으니까 내 기분을 더 좆같이 만들지 말고 꺼져' 라는 태도가 디폴트인 것처럼 말이다. 일하지 않는 프랑스사람들은 꽤 친절하고 호탕하다. 심심하니까. 기본적으로 사람하고 소통하길 좋아하고 사람을 일아가는데나 일상에서의 대화를 굉장히 중시 여긴다. 물론 불어를 할 경우에. 영어를 못하거나 하기 싫어하는 프랑스 사람에게 영어로 도움을 요청하면 '불어가 아닌 영어가 공용어인 것도 좆같으니까 내 기분 더 좆같이 만들지 말고 꺼져' 라는 식이다. 아무튼 런던에서는 운 좋게도 길을 걸으면 간혹 사람이 '쟤는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인가' 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거나 '쟤는 어디서 온 것 같니' '1도 모르겠어'하고 저들끼리 수군댄 게 내가 겪은 불쾌한 경험의 전부였다. 오히려 다인종국가라고 다양성을 광고하는 프랑스 파리보다 더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런던에서 일하고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표면적으로는. 거리와 지하철도 훨씬 깨끗하고. 와이파이는 또 어떻고. 버스에서 와이파이가 잡히다니. 프랑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맞이한 것도 점검 중인 공항 와이파이 서비스와 내 커피를 만들어 놓고는 내 앞으로 밀어주지 않고 '잘가. 근데 이거 니꺼야.' 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하는 스벅 직원이었다.

참. 이지젯에 핸즈프리 서비스를 이용했는데 좋았다. 보딩패스 받는 곳에 5파운드 내면 기내용 가방을 수화물로 받아준다. 내 더플백이 9키로인데다 발꼬락때문에 움직임도 불편했기에 너무 반가운 서비스였음. 게다가 수화물로 붙여주니까 스캐너도 통과하지 않으며 내 다이어리와 이어폰과 햄버거는 여전히 에코백에 있었고 나와 함께 기내로 반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수증과 함께 보딩 우선권도 주어서 일반 승객들과 다른 줄에 서서 빠른 보딩을 할 수 있다. 내 에코백에도 딴지를 걸지 않았으니 핸드캐리용 가방이 1개만 허락된다는 점과 수화물을 정식으로 추가하려면 거의 20~30 유로를 내야한다는 점을 생각하면..개이득. 실제로 돌아올 때는 수화물을 추가하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약간 사기같음. 물론 에코백이 아니라 배낭을 매고 있었다면 제지가 들어와서 가방을 합치거나 추가수화물을 구매하라고 했을 것 같다. 라이언에어보다 탑승감도 좋았다. 라이언에어 탔을 때 다이어리에 유서 쓴 적 있으므로..

덕질 여행이어서 덕질하는 공간에 여행기를 남기는 것인데 생각보다 덕질한 내용이 없도다....오이스터 카드 환불도 깜빡해서 런던에 다시 가고 싶다. 내가 갔을 때 빅벤도 공사 중이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발 아파서 못 간 마켓도 가고 싶고. 버밍엄에서 피키 블라인더스의 스멜을 느끼고 싶다. 이스트본도 멀쩡한 발로 배낭 매고 세븐시스터즈까지 걸어가고 싶다....(불가능)

저 제일 뾰족한 부분이 이스트본인것같은

현지 음식을 안 먹어서 좋은 여행으로 남은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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